꽃봉산 , 두악산 자료
5/22 단양 두악산 덕절산 충주호 암릉조망 산행
단양 덕절산(780m)과 두악산(723m)을 갑니다.
충주호와 그 주변의 산을 한눈에 조망하고 만끽할 수 있는 산입니다.
두악산은 단양팔경 중 상선암·주선암·하선암·사인암의 4경이 자리한 단성면에 있는 산으로
인근의 도락산에 비해 훨씬 덜 알려져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으며,
일명 소금무지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화재를 막기 위해 소금을 묻고 물을 뿌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합니다.
지금도 산 정상에는 소금이 가득 담겨 있는 항아리가 네 개 묻혀 있으며,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 매년 지역의 발전과 안녕, 풍년을 기원하는 소금무지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또한 옛날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네들이 소금무지에서 기도를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덕절산은 단양팔경(丹陽八景) 중 2경인 하선암(下仙岩)과 사인암(舍人岩) 사이에 솟아 있으며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여 태고의 산악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로 화강암과 편마암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정상에서는 금수산과 소백산·황장산·월악산이 눈에 들어오며,
충주호가 바로 발 아래에 있는 듯이 내려다 보인다.
산행지: 단양 두악산 덕절산 충주호 암릉조망산행
◈일 시: 2016년 5월 22일 7:30
◈출발 시간: 법원정문 7:30, 동아쇼핑 7:40, 광장코아 7:5, 성서홈플러스 8:00
◈등산코스: 단성치안센타- 단봉사-소금무지-두악산-뒷뜰재-덕절산-가산교
◈도착예정시간 20:00 이전(도착예정)
◈참가비: ₩ 32,000
◈포함사항: 차량비, 가이드비, 조식(김밥, 또는 약밥 + 식음료)
◈문의및 예약전화: ☎ 256-0786, 010-3818-0786,
◈준비/복장: 중식(도시락), 등산복과 등산화, 간식, 개인비상약 등
◈인원/차량최소인원: 20명이상 출발 / 45인승 관광버스
Ⓐ팀 =▶ 가산삼거리-덕절산-두악산-소금무제전망대-상방리
(약 8.8km, 5시간~6시간)
Ⓑ팀 =▶ 소선암공원-두악산-소금무제전망대-송어양식장
(약 5.5km, 4시간~5시간)
5/22 함양 꽃봉산(731m) - 산청 공개바위(755m) 원점회귀산행
함양 꽃봉산(731m)!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꽃이 활짝 핀 모양을 한 봉우리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근래에 '한국판 피사의 사탑'이라고 불리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의 공개바위는
산청과 함양 등 지리산권 일부 주민들에게만 알려져 있다가 2007년 부터 대중들에게 소개가 되었다.
해발 755m에 위치한 경사 60도 안팎의 산비탈을 딛고 우뚝 솟은 이 바위는
6면체 모양의 둥그스름한 바윗돌 5개가 석탑모양으로 포개져 있어 전체적으로는 기다란 자연석탑 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 12.7m 둘레 12.4m 크기인데 수직으로 선 것이 아니라 25도 가량 비스듬히 서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무너질 듯 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
2007년 9월 경상남도 기념물 제266호로 지정됐다.
◈들머리, 날머리 : (원점회귀)
◈산행 소요시간 : 4:00~4:30 정도
산행지: 함양 꽃봉산 공개바위 원점회귀 산행 ◈일 시: 2016년 5월 22일 7:30 ◈출발 시간: 법원정문 7:30, 동아쇼핑 7:40, 광장코아 7:5, 성서홈플러스 8:00
◈등산코스: 평촌마을-팽나무쉼터-임도-주능선-꽃봉산-운서리방향 이정표-771봉-공개바위이정표-공개바위(되돌아 나와서)-운서리방향 이정표-천상바위-임도-운서쉼터(지리산둘레길 합류)-운서리-구슬박재-팽나무쉼터-동강리 평촌마을 (약11km) ◈도착예정시간 20:00 이전(도착예정)
◈참가비: ₩ 30,000
◈포함사항: 차량비, 가이드비, 조식(김밥, 또는 약밥 + 식음료) ◈문의및 예약전화: ☎ 256-0786, 010-3818-0786, ◈준비/복장: 중식(도시락), 등산복과 등산화, 간식, 개인비상약 등 ◈인원/차량최소인원: 20명이상 출발 / 45인승 관광버스
** 공개바위**
인적이 드문 깊은 숲 속, 미스터리한 바위 탑, 사람이 쌓았다고 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기엔 그 형상이 너무나 신비로운 바위 탑. 비스듬히 쌓인 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 바위 탑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지리산 깊은 숲 속 오랜 세월 숨어있던 거대 5층 바위 탑의 실체를 SBS '순간포착 ! 세상에 이런 일이‘ 에서 그 미스터리를 공개 했다.
2006년 3월 17일 조선일보에서도 기사화된 경남 산청군 금서면 병곡리 지리산 자락에 소재한 공개 바위로서 산청군은 이 탑을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지정신청을 하기위해 2007.1.12 계명대, 경상대 교수님 두 분과 경남 문화재 담당 공무원까지 실사를 마쳤고 2007년3월 24일 경상남도 문화재 관리위원회에서도 기념물로 지정 하였다. 일본의 문예춘추 사진부 기자도 직접 와서 사진을 촬영해 갔고 나중에 잡지에 실렸다고 한다.
.피사의 사탑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5층 바위탑으로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야산 755m 능선상에 있는 이 바위탑은 5개의 육면체의 바위로 이뤄져 추정 무게만 100톤. 높이 12.7m. 둘레가 12.4m 나 된다. 산비탈 경사가 60도나 되는 곳에 서있는 5개 돌덩이는 25도 각도로 곧 기울어져 넘어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그동안 인근마을 주민들만 그 존재를 알다가 모습이 드디어 공개 되었다. 하지만 자연석인지 아니면 토속신앙을 위해 만든 인공 탑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언제 만든 것인지 산청군에도 기록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지리산에는 삼베 구만필로 짠 치마를 두른 거대한 마고할미가 살았는데 공기놀이를 좋아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날 마고할미가 떠나면서 가지고 놀던 공깃돌 5개를 포개 놓았는데 그 공깃돌이 바로 공개바위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역주민들도 이 바위 탑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다. “사람이 쌓았다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자연이 만들었다기엔 형상이 너무 신비스럽다며” 전문가 등의 현장 확인결과 지렛대로 바위를 이동 시킬 수 없을 만큼 가파른 지점에 있어 자연풍화작용으로 돌탑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공개바위라는 확실한 어원은 공기 돌 놀이(5개)의 경남 서북부 방언은 공개놀이라 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이에 연유되어 공개바위라고 불렀다. 방언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미 고유명사화 된 것이어서 공개바위라고 한다.
**안락문과 통락문**
누군가에 의해 안락문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지만 예전엔 그곳을 금강대라고 이름 불렸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두개가 쪼개져 있는 그곳에 엽전만한 금부처가 있는데 도인이 나타나면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을 믿고 노장대에 살았던 손종만 씨는 그곳에서 부처를 찾는다고 어렸을 적에 많은 고생을 했다는 후문도 들려 온 곳이다.
바위틈새 안락문을 통과하면 <통락문> 말뚝이정표가 있다. 같은 장소를 두고 통락문으로도 부르는 것은 안락사(安樂死)가 실패하면 통락사가 될 수도 있음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함양독바위**
“함양독바위는 생긴 모습도 특출하고 대단하거니와 주변의 지형을 보면 풍수쟁이가 아니더라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뒤로는 크게 상내봉능선과 면계능선이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독바위를 감싸고 있고 엄천강이 포근하게 받치고 있어 환상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독수리 머리에서 지맥인 황새날등이 시원스레 뻗어 내리고 있는 정수리에 독바위가 기품을 품어내며 서있다.
어디 그뿐이랴. 펼쳐진 날개 안쪽으로 또 다시 양쪽의 솔봉능선과 상대날등이 황새날등을 이중으로 근접호위하며 품고 있는 형상이다.
여기에다가 하늘이 일부러 천하 명당자리에 내려준 듯 암자터와 동굴을 이룬 바위들이 그렇게 많으니 노장대 마을의 연유가 그러하듯이 예로부터 수행자들과 비결꾼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는 명당이다.
“한 부인이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독녀암의 전설은 듣고 흘려버릴 야사가 아닌 실체의 역사로 다가온다.“
.굳이 이 바위의 명칭에 함양이라는 지명을 부치는 이유는 동부능선의 진주독바위와 구별을 위한 것으로 두 독바위가 이름은 같아도 어원은 다르다.
동부능선의 진주(산청)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 독(甕) 바위가 되었고, 이 곳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독녀암을 두고 산 아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각각이다.
산청 쪽의 화개 사람들은 상투를 닮았다고 상투바우라 하고, 함양의 휴천 사람들은 독아지를 닮았다고 장독바우라 부른다. 또 한 마천 쪽 사람들은 筆鋒이라 부르기도 하기에 마천의 60번 도로 위에서 확인해 보니 붓끝을 닮기도 했으나 가장 두드러진 형상은 유림 쪽에서 본 상투 모양의 독바위 모습이다.
.예전에 함양군에서 운암마을에서 노장동을 거쳐 이곳 독녀암 까지를 빨치산 탐방루트로 지정을 해서 함양 독바위를 “노장대” 라고 하였으나 한국전쟁까지 노장동에서 5대를 살았다는 <손종만>씨 외 여러 지역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장대는 토착민들이 부르는 노장동 마을의 별칭이며 함양독바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노장대는 노장동 마을의 옛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일제강점초기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행정표기상 노장대 마을이 노장동으로 바뀐 듯하다. 독바위는 그 예전부터 독바위라고 불렀다고 문헌에도 나와 있다.
다섯 개의 거대한 바위로 구성된 함양독바위는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여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어 독녀암의 [독]자를 인용하여 독바위라 전해졌다 한다.
**신열암터**
“신열암 암자 터는 정확히 독바위에서 서쪽으로 2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큰 바위를 등진 곳에 암자의 필수 조건인 샘이 있고 축대의 흔적과 구들장돌, 기와조각과 옹기 및 자기파편이 주변에 널려있고 묻혀있다.
옛날 고승들은 절터를 잡을 때 먼저 그곳의 물맛을 보고 잡았다 하더니만, 바위틈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석간수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고, 물맛은 흔히 말하는 감로수 수준이다.
앞서 지나온 수십 길 벼랑 위에 터 잡은 선열암이 고행승의 수도처 같았다면, 이 곳 신열암은 암자 터가 편안하고 아늑해서 학승의 공부도량 같은 곳이다. 구름처럼 떠도는 운수납자를 주저앉게 하는 눅진한 그런 곳이다.
한편 산 아래 사람들은 이곳을 “독바우 금강대” 라고 부른다.
지금 현존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지만 금강대와 주지승에 관한 얘기들을 선대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까지 신열암터에는 거의 원형의 기왓장이 많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편력으로 보아서는 신열암은 암자 이름이 어느 때인가 금강대로 바뀌면서 거의 19세기 초까지는 존재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엔 근세에 누가 기도터로 사용을 했는지 기와조각들로 축대를 쌓고 구들장 흔적까지 있다. 이곳에는 후세의 누군가가 기도터를 삼아 정착을 하였던지 아예 기와파편으로 석축을 쌓아서 축대를 만들어 놓았다. 고열암은 예전에 일반대중의 기도 도량이었다기보다는 학승이나 구도승의 도량이었을 것이다.”
예전 <고열암에서 자다>안내문이 있었던 곳인데 왜 안내문을 철거했는지... 중요한 의미 있는 자료일 것인데...
<고열암에서 자다[宿古涅庵]>
병든 몸을 지탱하고자 하여
잠시 포단을 빌려 깔고 자는데
소나무 파도가 달빛 아래 들끓으니
구곡에 노니는 듯 착각케 하네
뜬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고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 있구나
오직 정직한 마음을 가진다면
혹 산신령의 비록(備綠)을 얻을는지
-김종직의 “유두루록” 중에서-
위의 글은 <김종직 ; 조선초기 성리학자, 호는 점필재, 함양군수 역임(1470년~1475년), 1472년 지리산 기행문 “유두루록” 지음> 선생이 함양관아에서 출발하여 지장사, 선열암, 신열암 등 세 암자를 거쳐 그 날의 숙박지인 고열암에서 천왕봉 등정 길 산행 첫 밤을 묵은 후 지은 時이다.
**의논대**
수 십 명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면적의 너럭바위가 있으며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곳에 기거하는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인근의 세 암자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의논대라 한다.
**선녀굴 암자터의 비화**
큰 바위들을 등지고 석간수가 풍부한 이곳도 절터의 흔적으로 기와파편이 널려있고 이 곳 역시 금낭굴 암자 터와 같이 무명암자이다. 의논대에서 인근 세 암자의 중들과 대승 소승을 논했다는 노숙 우타스님이 거처했던 곳이 이 곳 선녀굴이 아닌 가 추측을 해본다. 이 암자 터는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작은 암자가 있어서 스님이 가끔씩 송대리에 내려와서 소금을 얻어가고 했다고 한다.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했던 전설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여성 빨치산 이은조가 사살된 곳으로서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고 굴 앞에는 바위가 가로막아 바깥쪽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은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다.
바위 안쪽에는 제법 널따란 공간이 있으며 옆에는 샘물까지 있어 빨치산이 은둔하기에는 정말 좋은 장소였던 것 같다. 바위 앞에는 네모반듯한 터가 있으며 굴비트와 샘터도 있다.
선녀굴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데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이 넓은 2중 동굴이어서 굴 내부에서조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 빨치산의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었다고 한다. 근방에는 이와 비슷한 동굴이 5개나 더 있다.
* 선녀굴 : 선녀굴은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던 전설이 있으나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해발 약 1000m에 위치한 선녀굴은 마지막 여성 빨치산이었던 망실공비 3인 부대인 정순덕, 이홍이, 이은조 3인방이 10여년 동안 은거해 있었던 곳이며 여기서 정순덕과 함께 했던 마지막 빨치산 이은조(45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가 1963년 2월 토벌대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963년 11월 정순덕이 체포되면서 증언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이 암자 터는 해방직전 까지만 해도 작은 암자가 있어서 스님이 가끔씩 송대리에 내려와서 소금을 얻어가고 했다고도 한다.
* 선녀굴 암자터 ; 선녀굴은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최후의 3인부대로 떠돌던 중 3인중의 한 사람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인 이은조(45세)가 사살된 현장입니다. 1961년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가 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합니다. 선녀굴의 선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였던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추성의 석덕완 할아버지부터 1962년 지리산 선녀굴에서의 마지막 빨치산 사건(정순덕, 이홍이, 이은조)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그것을 정리해 둔 적이 있습니다. 석덕완 할아버지께서는 1962년 선녀굴에서 문영만으로부터 이은조가 사살당하고 그 다음날 마천 방위대의 일원으로 선녀굴 부근을 직접 수색했던 장본인으로서 자세한 내막을 알고 계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