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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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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정(지홍석) 2009. 6. 1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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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가는 길

                                                                                                                                           양숙이

 

  복사꽃 향기 그윽하던 들녘이 여름 햇살에 손짓한다. 길섶에는 코스모스와 배롱나무 꽃이 줄지어 서고, 선경옥계라는 팻말이 영덕의 명산 팔각산이 가까웠음을 예고한다. 먼빛으로 본 팔각산은 뿔 모양의 여덟 개 바위봉우리로 등산길이 만만치 않음을 날카로움으로 시위하듯 다가선다.

 

 오전 10시30분, 옥계계곡 입구 등산기점에 다다르자 예정에도 없던 선두 안내자의 책임을 떠맡긴다. 하산지점 목적지까지 가는 방향에 갈림길이 나타나면, 진행하는 등산로 쪽으로 방향 표지기를 달아 뒤따르던 회원들이 산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배려하란다.

 늘 고시랑 얘기하며 따라다니던 터라, 헛갈릴 길이 없다지만 초행길의 선두가이드 자리가 책임이 막중해서 걱정이 앞선다.

 

  개울을 따라 몇 발자국 옮기자 여느 산과 달리 암벽에 설치된 108개 철 계단이 앞을 가로막는다. 어느 산이든지 산수가 좋은 명당은 사찰이 차지하고 있는데 지도상으로 본 팔각산에는 왠지 절이 보이지 않는다. 108개라 하는 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에 잠겨 층층 오르다 보니 오솔길이 나타나고 꽃잎 지나간 철쭉이 산 꾼을 맞이한다.

 

  가파른 등산로에 하소연하듯 내어 쉬는 호흡은 이미 일정치가 않다 아담한 암 봉 사이에 1봉 표지 석이 나타나고 다소 수월하게 바위 허리에 붙여진 2봉 표식을 지나, 3봉은 좌측으로 난 버찌기 굴을 버리고 설명대로 우측으로 진행한다.

 오늘 가장 까다롭고 힘 드는 구간인가보다. 험한 암벽에 굵은 밧줄을 잡고 가야 하니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데 먼저 가겠다고 끼어들어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도 있다. <인자요산>이라는데 산에 와서도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구슬땀이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시야가 확 트이는 5봉 전망대 바위에 올라섰다. 눈길 머무는 곳 하늘과 맞닿은 푸른 동해가 아스라이 보이고, 주왕산 별 바위, 멀리 겹겹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산이 땀에 젖은 몸을 보듬어 주듯 휘감겨 온다. 서쪽으로 동대산 바데산이 손에 잡힐 듯 하고, 청청한 옥계계곡의 물줄기도 시선을 끌어당긴다. 시원한 바람에 몸 맡기고 복 수박으로 갈증을 달랜다. 앞뒤 돌아볼 여유 없는 팍팍한 삶에서 조금은 여유를 찾은 듯, 여기저기 아름다운 것들 돌아보고 이쯤에서 몸도 마음도 내려놓고 주저앉아 마냥 쉬고 싶다.

 

  아쉬움을 남기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정상은 저만치에 있고, 앞으로 가야 할 봉우리들도 결코 쉬울 것 같진 않지만 아름답게 다가온다.

 어릴 적에 산 그림을 그리려면 삼각형으로 삐죽삐죽 도깨비 뿔 같은, 산의 형태라고 느낀 그것이 바로 이 산의 모습이다. 공포를 느낄 만큼 급경사 암벽을 푹 꺼졌다 오름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7봉을 지나고 안전지대로 들어섰다.

  뒤돌아보니, 능선에는 암벽을 내려올 사람들로 줄을 섰다. 아찔한 저 벼랑을 어떻게 왔나 싶지만, 기암과 어우러진 소나무의 그림같이 수려한 풍광에 금세 저곳으로 되돌아가고픈 심정이다.

  등산을 시작한 지 두 시간여만 에 정상에 도착했다. 두루뭉술한 정상 8봉엔 중식을 하는 분들로 시골장터와 같이 소란스럽다.

 

  이제부터는 사실상 하산 길이다. 정상 벗어난 지 20여분 후 갈림길의 귀로에 선다. 지도상에는 직진하는 능선길이 맞는데 우측으로 더 많은 표지기가 걸려 있어 지름길인가 보다 생각하고, 능선 쪽으로 시선 끄는 나뭇가지에 노란색 리본 얌전히 달아놓고 같이 가던 분은 보내고, 나는 우측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파르게 계속 내려가는 게 뭔가 조금은 이상 했지만, 곧 만나겠지 하고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가는데 들고 간 무전기로 연락이 온다.

  "어디쯤인데? 식사는?"

 배고프면 장소 좋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대기하면 곧 따라가겠다는 무전을 듣고 10여 명 앉을만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퍼질러 앉는다.

 

  주능선이 아닌 지능선 5부 능선쯤이라 별 조망은 없지만, 호젓한 숲길과 하늘 떠 바친 아름드리 적송 어우러진 단풍나무 사이로 하늘빛이 곱게 스며든다.

 바람결에 곤충의 숨소리도 들릴만한 고요함에 마음과 몸은 잠시 숲의 평온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깊은 산 속에 생전 처음 혼자만의 여유로움에 무서움도 잠시 잊은 채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니 자국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라는 길(최희준 노래)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발걸음을 아끼며 왔기 때문에 중간의 안내자가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듣고 있었다는 듯 연락이 온다. 갈림길을 지나 장소 좋은 곳에서 회원들과 중식을 하고 있다는데 위치가 이상하여 지도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니 순간의 방심이 나를 옭아매어 예정된 코스가 아닌 곳으로 내려오도록 유인한 것이다.

 지금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내려와 버려 참 난감하다. 내 배낭 속엔 맛있는 족발도 있고 함께 온 사람들과 나눌 청량한 과일도 있어 가슴 든든하게 생각 했는데 갑자기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듯 하여 짜릿한 은밀함도 솔바람도 그저 공허할 뿐이다.

 

  다행히 지도에는 이 길로 내려가면 예정된 길과 만나는 지라 그냥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조금 전 새털 같은 마음들은 어디다 갔는지 돌덩이 매단 마음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계곡 맑은 물에 풍덩 들어가서 세수도 하면서 마음 추슬러 보지만 팔각산 뒤편 응달진 계곡을 훑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이다.

 

  하산지점은 정확히 찾아왔지만 예정된 길로서는 내려오지 못했다. 다행히 표지기는 정확하게 달아 다른 분들은 예정된 코스로 무사히 내려왔지만 마음이 무겁다. 비록 내가 내려온 길이 근래에 생긴 지름길이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위로하고 위안해서는 안 된다. 조금은 낮은 듯한 677m의 산에 계절적으로 무리가 없고 단조로운 등산로라 가벼이 넘길 수도 있겠지만, 혹한의 겨울에 천여 미터가 넘는 깊은 산 속의 엉뚱한 곳으로 한참을 내려 왔다면 끔찍하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뙤약볕 드는 반반한 바위 위에 앉아 도시락과 모두 함께 먹으려고 준비한 족발을 꺼내지만 처량하여 얼려온 캔 맥주만 마시고 누워본다. 파란 하늘엔 솜털구름 한 무리 어디론가 흘러가고 주변엔 눈이 부신 햇살에 춤추는 신록이 다가오는 가을의 속삭임과 물들임을 준비하고 있다. 여름이 가는 그 길로 가을이 벌써 성큼 들어서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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