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재 큰 고인돌-영남에서 최고 크기, 무게 150톤 추정
노당1리 은행나무(보호수 수령 500년정도)
기계 고인돌
고인돌은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북방식 고인돌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남방식 고인돌로 나누어진다. 가끔씩 지하에 묘실을 만들고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개석식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 무덤방식은 철기시대 이전인 청동기 시대에 주로 설치되었던 형식으로 대체로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는 움무덤[土壙墓]으로 전환되므로 인해 시대의 뒷자락으로 퇴장하게 되었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기계면에는 대부분이 남방식 고인돌로 추정되며 거의 모든 동네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제까지 기계면에 분포되어 있는 사실을 추정해볼 때 수백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되돌려 본다면 기계면은 <청동기 시대의 수도>로 불리워도 손색없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문성동 고인돌
문성동 마을 앞에 위치한 이 거석은 대략 길이 5미터에 너비 2.5미터, 높이 3미터의 거대한 거석을 굄돌 위에 세워 놓은 전형적인 남방식 계통의 고인돌로 인정된다. 거대한 규모와 독특한 형태, 그리고 인근에 산재한 고인돌 가운데 가장 암질이 우수하고 독특하며, 칼로 자른 듯한 면들이 여느 고인돌과 다르다. 결국 인근에서 가장 보기좋은 바위를 선택하여 축조하였는데, 이러한 점에 비추어 이 곳 기계면 분지에서 가장 세력이 강하였던 신분의 무덤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문성동 고인돌은 산줄기에서 떨어져 들판에 홀로 우뚝 서있는데, 자연적으로 이곳까지 굴러왔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위치이고, 게다가 15도 정도 비스듬하게 세워져있는 상황이 성계1리 고개 ( 노당재 )에 세워져 있는 고인돌과 같은 형식과 모양새이며, 단지 앞면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고인돌의 장축은 북쪽을 향한 340도이고, 이 거석 밑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다. 마침 주차해 놓은 1톤 트럭과 비교해 볼때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칠성재에서(사진 속 인물은 일본인 미우라 씨) 성계리 고인돌 노당제(성계-안강) 정상 부근에는 약 7기의 고인돌군이 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이 (높이 4,8 둘레 15미터)에 달하며 이는 남한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추정된다. 탐방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두번째로 큰 고인돌에서 고인돌의 성혈인듯하기도 하고, 암각화인 듯한 동그란 바윗그림들이 정형화 되어있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해서 전문가의 분석이 필요한 부분으로 판단되기도 하였다. 성혈은 구멍을 파고, 하늘을 향하여 있는 경우가 많아 무엇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문성리 고인돌 (기계면 문성리)
국도 31번을 타고 포항에서 청송으로 가다보면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기계천을 따라 가게 된다. 하천 양쪽에서는 인비동을 시작으로 성계1리까지 완만한 경사면에 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최소한 20여기 이상 산재하고 있다. 기계면 문성리 마을 앞에 위치한 이 거석은 길이 5m에 너비 2.5m 높이 3m의 거대한 거석을 굄돌 위에 세워 놓은 전형적인 남방식 계통의 고인돌이다.
남방식 계통으로는 규모가 아주 크고 인근에 산재한 고인돌 가운데 가장 암질이 우수하고 독특하다. 칼로 자른 듯한 면들이 여느 고인돌과 다르다.
문성리는 새마을운동 발상지로서 다른 볼거리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