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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타'에 대한 단상 (다음에서 발췌함)

산정의낙서

by 산정(지홍석) 2012. 9. 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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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자비-피에타(Pietà)는, 진정한 구원의 방식

작성자 : 고양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발췌함

 

기자: 영화에는 닭이나 토끼 등 동물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인가 ?

김기덕 감독 :  \'피에타\'의 캐릭터가 닭, 토끼, 물고기 같은 것을 도살해서 먹는 캐릭터다. 죽이고 싶은 심리가 몸 안에 가득찬 캐릭터의 이미지다. 그 장면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강도\'의 결말을 미리 예고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다음\' 영화 사이트에서 \'고양이\'라는 분이 쓴 리뷰를 봤는데 정말 잘 썼더라. \'피에타\'를 내가 생각한 것과 가장 가깝게 해석한 것 같았다.

 

 

프롤로그

자본은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 왔다. 돈이라는 사탄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을 짐승처럼 굴복시키고 타자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인간의 구원은 어려워 보인다. 스스로 현대라는 지옥을 만든, 인간의 구원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족이든, 사랑이든, 물질 앞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자본 앞에 인간은, 나약한 괴물이다.

 

자본이 파괴하는 인간성

강도는, 이러한 짐승의 상징이다. 그는 닭을 제대로 익혀 먹지도 않고, 날 것처럼 먹어대는 짐승이다. 타인의 고통은 필요 없다. 타인의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 강도에게 공격을 당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가족의 테두리 안에 괴로워한다. 어떤 이는 사랑스런 아내가 있고, 어떤 이는 뱃속의 아이가 있고, 어떤 이는 늙고 병든 엄마가 있다. 모두, 가족 안에 있다. 하지만 강도에겐 이러한 가족이 없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이나, 타인의 가족이 안고 살아야 할 슬픔을 알지 못한다. 자본은 그의 노예인 인간들을, 이처럼 파괴자로 만들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그랬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 한국 사회가 그렇다. 돈을 위해선, 돈을 벌기 위해선, 타인의 삶 따윈 무시해도 그만인 것이다. 극소수의 부르주아가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가지고, 다수의 민중을 지배하고 조롱하며, 마치 날 것을 탐하는 짐승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작품 속의 배경인, 화려한 빌딩과 철거 직전의 청계천 상가의 대비가 그러한 것을 상징한다. 커다랗고 위엄 있어 보이는 쭉쭉 뻗은 빌딩 숲 사이, 마치 유폐된 섬처럼, 청계천 상가는 우울한 잿빛으로 그렇게 포위되어 있다. 자본을 가진 지배자가, 자본이 없는 피지배자를 사방에서 억누르듯이, 서울이라는 한 공간에 서로 다른 국경을 가진 이질적인 공간적 이미지가 화면 안에 가득히 흐른다. 청계천의 상가 노동자들을 그렇게 포위하고 공격하는 것은, 자본의 앞잡이이자 자본의 개인, 강도이다. 강도는 어쩌면 그래서 더욱 불쌍하고 가엾어 보이기도 한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그렇게 자신도 같은 하층민이면서, 자본의 칼을 들고 서민들을 공격한다.

 

인의 삶에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나

그러던 중, 강도에게도 가족이 찾아온다. 엄마라고 자칭하는 여자. 강도는 처음에는 그녀를 매몰차게 거부하지만, 차차 그녀를 엄마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야수의 탈을 벗어 던지고 사람의 아들이 된다. 자신이 그토록 공격했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엄마의 존재를 통해 자신도 느끼게 된다. 엄마가 누군가에게 공격당하는 전화기 너머의 소리에, 강도는 울부짖으며 괴로워한다. 자신도 지켜야 할 가족이 생기면서,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가족에 관심을 갖게 된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두 손을 훼손하겠다는 젊은 노동자를 이해하게 되고, 한평생 청계천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의 최후를 안타깝게 목도한다. 그들 모두에게 가족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슬픔이 절실했음을 강도는 엄마의 존재를 통해 공감하는 것이다. 점점 짐승이 인간으로 성숙한다. 엄마라는 모성의 힘을 통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엄마라는 가족의 존재로 그는 순결해지고, 아이처럼 선량해진다.

 

진정한 복수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 이 작품만의 독특한 복수가 있다. 박찬욱 식의 형이하학적이고 직접적인 복수가 아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구원’의 복수가 있다. 박찬욱은 칼로 찌르고 자르면서 직접적인 공격형 복수의 완성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완성한다. 어쩌면 가장 설득력 있고 인과성이 분명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복수는 너무나 역설적이다.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에게, 직접적 타격이 아닌, 종교적 회개와 인간의 ‘양심’을 갖게 한다. 원수에게 ‘양심’과 ‘마음’을 갖게 함으로써, 그 원수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짐승에서 인간으로 변모하게끔 한 것이다. 그 원수가 진정으로 괴로워함으로써, 복수가 완성되게 하는 것이다. 낡은 건물 위에 위태롭게 올라선 엄마와, 그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 하듯 엎드려서 회개하는 강도의 대비적 모습은 그야말로 이 작품의 압권이다.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우리 엄마만은 살려 주세요... !!’ 이 애절한 절규가,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었다. 여자의 복수는, 원수가 ‘양심’을 갖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진정으로 괴로워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럼으로써, 여자는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 강도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구원’ 받았다. 이것이 바로, 자비 - 피에타(Pietà)이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용서와 구원이, 어쩌면 감독이 바라는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유일한 돌파구와 해결책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소재의 상징성

 

이 작품에는 동물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처음의 붉은 닭의 이미지는, 길들여지지 않은 강도의 야성을 상징한다. 실제 그 닭을 대충 삶아서 먹는 강도의 모습에서, 야성의 극한의 모습이 보여 진다. 화장실 바닥에 가득한 닭의 피 흥건한 내장의 이미지도 그러한 강도의 짐승을 상징한다. 두 번째로 토끼의 이미지가 나온다. 자살한 노동자의 어머니에게서 가져온, 토끼는 강도의 화장실에 방치되어 있다. 엄마는 그러한 토끼를 풀어주고, 급기야 집 밖으로 내보내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토끼는 이내 아스팔트 위에서 차에 치여 숨을 거둔다. 이것은 어쩌면 강도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강도도 엄마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 엄마가 토끼를 새로운 삶을 위해 풀어주었듯이, 엄마를 만난 강도도 새 삶을 살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마치 토끼가 아스팔트에서 피 흘려 죽듯이, 강도도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질질 차에 매달려 끌려가며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엄마에 의해 새 삶을 찾았지만, 결코 아스팔트 같은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은 그들을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강도는 살이 찢겨 가며, 아스팔트에서 자신의 피를 쏟아내고 있다. 물론 이 장면은, 모든 것을 회개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고행으로 몰아넣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세상에 자비를 구하는 강도의 수도승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마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처럼, 아스팔트 위에 붉게 물드는 새벽의 핏빛은 숭고하게 묘사되며 영화의 결말과 여운을 장식한다. 그런 면에서 앞부분의 토끼의 이미지와 죽음이 더욱 공교하게 맞아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장어의 이미지가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사온 장어를 강도는 죽이지 않고 어항 속에서 살게 해준다. 그것은 엄마가 자신에게 준, 첫 선물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대상이기에, 강도는 어항 속의 장어를 기념품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는 그 장어의 목을 치며, 아침상을 마련한다. 강도는 그래서, 그 장어구이를 먹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엄마는 그러한 강도를 떠나보내며, 매정하게 장어를 씹어 먹는다. 여기에서 이미, 이 엄마의 정체가 어느 정도 암시된다고 볼 수 있다.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장어를 그렇게 요리하고 먹음으로써 엄마라는 여자는 강도의 자그마한 행복을 짓밟고 있던 것이다.

 

동물만이 아니라, 소나무의 소재도 상징적이다. 물가에 심어진 소나무, 강도는 이 나무가 잘 자랄지 의문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는 강도를 안심 시킨다. 이 소나무는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은 존재이다. 부모가 걱정하며, 아무 탈 없이 자라주기 바라는 자식 같은 존재. 엄마는 이 물가의 소나무가 잘 자랄 거라고 웃으며 확신한다. 엄마가 떠난 뒤, 강도가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강도는 힘들고 외롭지만 물가의 소나무처럼 꿋꿋이 인생을 살아갈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엄마가 뜨개질로 만들던 그 스웨터도 상징적이다. 그 스웨터는, 당연히 엄마의 사랑을 뜻한다. 엄마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 아들에게 입히려 한다. 강도는 왜 자기 생일날 케이크만 있고, 옷은 없냐고 묻는다. 엄마의 사랑을 입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에 엄마를 묻어주기 위해 땅을 팠을 때, 그때 거기에서 스웨터를 입은 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강도는 그 스웨터를 시체에서 벗겨내 자신이 직접 입는다. 이 엄마라는 여자가 자신의 진짜 엄마이든 아니든, 이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스웨터를 입은 강도는 엄마와 그 시체 옆에 나란히 누워 교감하고, 스웨터를 입고 서서 소나무에 물을 준다. 또한 마지막에 강도는 스웨터를 입고 차에 질질 끌려가며, 수도승의 고행의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엄마의 사랑을 입고, 자신과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솔직히, 나의 하찮은 글로 이 위대한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랴. 여운과 감동을 참을 수 없어 이렇게 횡설수설 지껄였지만, 이 작품을 보았다는 기념과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마음에서 글을 쓴 것이다. 평가를 할 만한 자격이, 나에겐 없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의 관객들과 평론가들 모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영화는 한국의 영화 산업과 관객이 아닌, 전적으로 감독 자신의 힘과 외국 평단과 관객의 힘으로 탄생되었고 유지되어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길을 걷지 않는다고, 얼마나 우리는 그를 매도하고 이방인과 아웃사이더로 내몰았지 않았나. 나도 또한 과거의 작품들 - 악어, 섬, 수취인불명, 파란대문 등 - 을 보고, 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의 새작품을 매도하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솔직히, 그의 최고 작품 -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 을 보고 굉장히 매혹되었음에도, 그의 그 이후 작품들을 초기작들의 불편한 이미지들 때문에 외면하고 경시했으니 말이다. 베를린의 사마리아와 베니스의 빈집을 왠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다. 그의 작품을 이렇게 개봉관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의 때를 조금이나마 씻고, 구원받고자 한다. 나에게도 이 작품은 용서와 자비 - 피에타(Piet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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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피에타'는 왜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이 됐나?

사진제공=NEW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힌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최고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기덕 감독은 지난 8일(현지시각) 열린 폐막식의 시상식 무대에 올랐다. 한국영화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쾌거다. 하지만 국내에선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 '피에타'는 왜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이 됐을까? 일반 관객들의 오해와 편견을 바탕으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살펴봤다.

▶김기덕 영화는 어렵고 재미없다?

영화는 허구다. 하지만 현실 세계가 투영돼 있다. 영화에 반영되는 현실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눈에 비친 현실이다. 그 현실은 일반 관객의 생각과 똑같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감독이 일반 대중이 바라보는 현실을 위주로 그려내면 상업영화란 평가를 받는다. 반대로 감독 개인경험이나 가치관에 집중하면 예술영화란 이름이 따라붙는다. 이렇게 감독 개인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를 작가주의 영화라 한다. 김기덕 감독 역시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꼽힌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온도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죄의식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피에타'도 마찬가지다. 악마 같던 남자가 엄마라며 찾아온 여자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물론 그 과정이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지진 않는다. 김기덕 감독이 주목하는 또 다른 소재가 '광기'이기 때문.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광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 누구나에게 내재돼 있는 본성이다. 해외 영화제에선 인간 본성 및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김기덕 영화는 잔인하기만 하다?

"음습하고 잔인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고 느끼게 되는 일반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의 영화가 무턱대고 잔인하지 않다는 점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베드신이나 살해 장면은 인간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삽입된 장면이 아니다.

모든 영화는 상징과 기호의 조합으로 돼 있다. 또 한 장면, 한 장면의 상징과 기호가 모여서 전체 영화의 주제를 상징하게 된다. 예를 들어 '모성애'를 주제로 하는 어떤 영화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엄마가 자식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차린 밥, 가난한 살림이지만 어렵게 마련한 학자금 따위가 모두 엄마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가 된다. 이런 기호들이 얽히고설켜 전체 주제인 '모성애'를 표현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이런 상징과 기호들로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조금은 투박한 듯한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관객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잔인하다는 느낌을 주는 살해 장면이나 베드신도 이런 상징과 기호의 하나다.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는 또 다른 이유다. 어떤 영화가 '작품성이 있다', '예술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건 이런 요소들이 짜임새있게 잘 배열돼 있을 때다.

이 때문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볼 땐 상징과 기호를 해독하느라 지끈지끈 머리가 아플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오락영화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김기덕 영화는 영화제용 영화다?

국내에서 상업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감독에게 해외 영화제는 자신의 영화를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김기덕 감독 역시 이번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열리기 전 "누군가가 폐막식 때 이름이 불려질 것이고 거기에 내 이름이 있으면 굉장히 감사할 것 같다. 수상을 한다면 내가 영화 만드는 환경이 좋아지는 것도 있기 때문에 주신다면 거절할 거 같진 않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각종 해외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한 '영화제용 영화'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다.

각종 해외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중 '영화제용 영화'는 티가 난다. 억지로 화려하고 예쁜 장면을 연출하려고 애쓰거나 심도있는 영화의 주제를 상징이나 기호가 아닌 배우의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란 말이 잘 어울린다.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티를 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이번 영화제의 경우,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과의 인연도 수상에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과거 김기덕 감독의 '섬'과 '수취인불명'을 베니스에 초청한 장본인이다. 또 토리노 영화박물관장 시절엔 김기덕 감독 특별전을 열 정도로 애정을 나타냈다.
정해욱 기자 amorry@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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