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봉화 각화산, 왕두산, 각화사
# 고산준령에 막힌 ‘청정산’ 맑은 기운 듬뿍
# 소백산 거대한 산줄기 파노라마 장관
‘한국의 시베리아’, 경북 봉화의 춘양(春陽)을 이르는 말이다. 3월까지 잔설이 있고, 전국에서 얼음이 가장 먼저 얼고 추위가 가장 매서운 곳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곳으로 눈이 많이 내리는 태백산의 절반이 춘양면이다. 영하 10℃는 기본, 한겨울 추울 때는 영하 20도에 육박한다. 워낙 추워서인지 ‘봄볕’이라는 뜻의 ‘춘양’, 면 소재지 또한 햇볕이 잘 든다는 의미로 ‘의양리’(宜陽里)다. 면 전체가 500~1,300m의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문수산(1,206m), 구룡산(1,346m), 각화산(1,177m), 왕두산(1,045.6m) 등에 둘러싸여 있다.
봉화의 대표적 산으로 자리매김되는 각화산은 산세가 중후하고 모난 데가 없는 전형적인 육산이다. 고산준령에 막혀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아 아직 청정한 산으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산 중의 하나다. 각화산이란 지명은, 춘양면 서동리 춘양중학교에 있는 보물 제52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는 람화사(覽華寺)를 676년경에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람화사를 생각한다 하여 각화산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각화산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는 석현리와 각화사 입구다. 운동 겸 산행을 선호한다면 석현리에서, 원점회귀형 등산에 조선 5대 사고(史庫)지 중 하나인 태백산 사고지를 연계하려면 각화사에서 시작한다. 88번 지방도에 위치한 춘양을 지나, 각화사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과수원이 보인다. 그 너머 왼쪽 능선 끄트머리에 멋진 노송 몇 그루가 표지기 구실을 한다.
왼쪽 임도를 따라 오르면 작은 저수지가 나타나고 산소 쪽으로 등산로가 열린다. 산소를 통과하면 동물들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려고 고압 철삿줄이 등산로를 막고 있다. 전류가 흐르는지 확인하고 본격적인 등산에 나선다. 초입부터 오르는 길이 녹록지 않다. 송이가 제철인 9월 중순까지는 등산로를 통제하기도 한다.
이곳 각화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춘양목(春陽木). 금강송으로도 불리며 ‘소나무 중의 소나무’, ‘백목의 왕’(百木之王)이라 불린다. 주산지가 태백산 자락의 봉화군 춘양면과 울진군 서면 일대라 춘양의 지명을 따 춘양목이라 부른다. 해발 6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연평균 온도가 4~10도의 차가운 기온과 사질양토 중 약산성 토질에서 자란다.
나무의 특성은 수형이 곧고 옹이가 없으며 일반 소나무에 비해 재질이 단단하며 뒤틀림이 적은 게 장점이다. 직사광선에도 변함없이 무늬가 아름다워 옛 궁궐의 신·개축 재목으로 진상되고 사찰과 관아는 물론 부호들의 대가 건축자재로 널리 이용되는 나무다. 현재도 각화산 서쪽 자락과 사찰 입구에 빽빽하게 자라고 있지만 지명도에 비해 아름드리 춘양목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거기다가 올곧은 소나무는 하늘의 별 따기다. 거기에는 나름의 슬픈 이유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말기. 태조 4년(1395년)에 창건한 경복궁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1865년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을 지시한다. 궁의 넓이는 432,703㎡, 막대한 재정과 백성의 노역도 문제였지만 궁궐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가 필요했다. 궁궐을 짓는 데 필요한 나무는 춘양목이었고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딘 인물 반듯하고 올곧게 자란 각화산 자락의 춘양목이 대거 벌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백산 일대에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춘양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태평양전쟁 전후로 대량 벌채로 수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석현리에서 주능선까지 올라서는 데 약 2시간이 소요된다. 각화산 정상은 주능선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5분 정도 더 가야 한다. 정상석 대신에 원형의 나무 표지판이 나무줄기에 매달려 있다. 삼거리까지 되돌아 나와 동쪽 등산로를 따라야 왕두산과 태백산 사고지로 갈 수 있다. 이윽고 뚜렷한 삼거리에 도착한다. 직진이 왕두산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사고지로 내려가는 길이다.
태백산 사고지는 한양의 춘추관, 강화도,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와 더불어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다. 조선 초기부터 여러 지방에 분산 보관해 오던 ‘왕조실록’ ‘왕실족보’ 등의 사고본이 임진왜란으로 거의 소실되자 다시 펴낸 사고본을 좀 더 안전한 곳에 재분산 보관한 곳으로 1606년에 지어져 일제강점기인 1913년까지 300여 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다. 1991년 2월 사적 348호로 지정되었다.
왕두산으로 가는 주능선을 따르면 등산 중 최고의 조망처가 한 군데 있다. 협소한 작은 바위 위에서 보는 남쪽 조망은 정말로 훌륭했다. 왼쪽 일월산에서부터 삼중 사중으로 거대한 산줄기가 거대한 파노라마를 그리고 한중앙 정면에 청량산이, 그 옆으로 소백산 주변의 산군들이 줄줄이 조망된다.
각화산에서 왕두산까지는 약 1시간 15분여가 소요된다. 왕두산은 낙동강 상류부 지류들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넓은 공터에 왕두산이라 쓰여진 목재가 세워져 있다. 왕두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서면 헬기장이다. 북서쪽으로 각화산 정상이 아름답게 조망되고 산자락 중턱의 사고지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헬기장에서 등산로는 오른쪽으로 지능선을 타고 이어져 내린다.
여유 있게 40분 정도 내려서면 각화사(覺華寺)다. 각화사는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 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 달현이 중수하였다. 이 사찰은 불교계에서도 알아주는 길지다. 유난히 강한 기운이 넘쳐 오래 정진을 해도 몸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정신이 맑아져 전국에서 발심한 납자 스님들이 안거에 들기 위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다른 선방의 결제 기간이 3개월인 데 비해 이곳 각화사만은 오래 정진을 해도 지치지 않아 결제 기간이 무려 9개월이나 된다고 한다. 사찰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서면 좌우에 춘양목이 빽빽하다. 각화사에서 주차장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석현리에서 각화산 정상을 오르고, 왕두산을 거쳐 각화사로 내려서는 데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각화사에서 등산을 시작해 왕두산과 태백산 사고지를 둘러보는 원점회귀 등산도 가능하다.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다.
등산을 하며 각화산과 왕두산의 맑은 정기를 마음껏 흡입하고 각화사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면 몸이 날아갈듯 가벼워진다. 청청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산 중의 하나다. 대구에서 각화산까지는 약 2시간 정도가 걸린다. 오고 가는 길에 봉화 한약우단지가 지척에 있어 육질이 뛰어난 봉화 한약우를 맛볼 수도 있다.
글·사진 지홍석(수필가·산정산악회장) san327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