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 구황산(九皇山)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산으로 정상이 천혜의 조망대다. 산의 높이는 500m, 인근의 선운산과 경수산보다도 높다. 바닷가에 위치한 여타의 산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산이다. 산자락 명당에 묘를 쓰면 9대에 걸쳐 임금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어 지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고창 문수사가 지척이다. 늦게 물들지만 가장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단풍지인 ‘은사리(문수사) 단풍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4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의 입구에서부터 중턱에 자리한 문수사 입구까지 진입도로 좌우 측 일대에 수령 100년에서 400년으로 추정되는 단풍나무 5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구황산의 원 산줄기는 호남정맥 내장산 까치봉과 백암산 사이의 순창새재에서 서쪽으로 가지 친 영산기맥(영산강 분수령, 목포 유달산까지 이어짐)이 뿌리다. 영산기맥은 남서쪽으로 35.4㎞를 달리며 입암산, 방장산, 문수산을 지나 구황산에 닿는다.
산행의 기점은 고창군 성송면 암치와 운선암의 입구인 고창남중학교다. 그중 암치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이 전북에서 패하자 전남 장성과 함평으로 퇴각하던 곳이다. 재의 정상부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조금 색다른 경험일 수 있다. 산객들의 발걸음이 많지 않아 등산로는 나 있지만 가시덤불이 더러 발목에 감기기도 한다. 그러나 등산을 시작하면서부터 코와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수목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민다. 산행 경력 30년이 넘었지만 이처럼 강력한 산의 향내를 맡아보기는 처음이다. 전라남북도의 도 경계지점이기도 한 오름길 능선에서부터 태풍 볼라벤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통째로 뽑혀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이 아프다. 조금은 희미하기도 한 길들여지지 않은 등산로는 암치에서 불개미재까지 1시간 동안이나 계속된다. 참고로 암치를 경계로 한 고산(高山`526.7m)을 연계해 등산을 하지 않는다면, 암치 조금 못미처 왼쪽 등산로 표지판에서 등산을 시작하는 게 좋다. 거친 등산로를 통하지 않고 바로 불개미재로 올라설 수 있다. 오름길 안부인 불개미재에서부터는 제대로 정비가 된 환상적인 길이다. 지나칠 정도로 정갈하고 운치가 빼어난 등산로는 마치 꿈속을 걷는 듯 몽환적이다. 숲에는 활기가 넘치고 등산로 주변의 수목마다 윤기가 자르르하다. 미끈하게 뻗은 기이한 수목들이 마치 살아있는 여인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중 한 나무는 정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등산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채 되지 않아 왼쪽이 확 터지는 삼거리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으로 구황산 정상까지는 오른쪽 능선으로 조금 내려서서 봉우리 하나를 더 올라야 한다. 많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길이 조금 거칠다. 정상까지 왕복하는 데 20분 이상이 소요된다. 암벽과 암봉으로 형성된 구황산 정상은 천혜의 조망대다. 고창의 성송`대산`무장`아산면, 고창읍 등 고창 지역이 한눈에 잡히고 동쪽으로 문수산과 방장산 사이로 백암산이 머리를 살포시 내미는 모양도 보인다. 정상의 암봉에는 5, 6명이 들어갈 수 있는 삼각굴이 있다고 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삼거리까지 되돌아 나와, 탁 트인 드넓은 평야 고창벌을 조망하며 점심식사를 한다. 조금 흐려진 날씨가 아니라면 저 멀리 서해바다까지 조망될 텐데 아쉽다. 그러나 그 여운을 서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이 조금이나마 위로해준다. 하산 길은 여러 갈래지만 독도에 신경 써야 한다. 좌우 측으로 빠지는 등산로와 임도를 만나도 주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능선 길을 따른다. 몇 해 전 산불로 인해 능선을 경계로 오른쪽 산자락이 벌거숭이가 된 지점도 통과하고 운치 있는 자작나무숲도 만난다.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은 등산로가 끝없이 송림 숲길로 이어진다. 어느 명망 있는 가문의 무덤을 지나야 추산봉(274m)에 닿는다. 언뜻 보아도 명당 처다. 기가 막힌 바위 전망대다. 오늘 등산 중 최고의 전망바위에 오르니 발아래로 운선암을 비롯해 고창벌이 완연히 조망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돌아 나오니 바위벽에 안동 권씨 천마제풍(天馬啼風)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추선봉 아래 양춘바위가 있다. 삼국시대 때 조각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상이 있다. 옛날 불공 드리러 온 양춘이란 여인의 젖가슴을 스님이 더듬어 욕을 보이자 여인은 자결하고 말았고, 죄를 뉘우친 스님이 바위에 그 여인의 초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TV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에 방영되기도 했다. 추선봉에서 고창남중학교까지 내려서는 등산로는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명품 송림 숲이 있다. 구황산 산행의 대미를 장식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처라는 속설을 뒷받침하듯 곳곳에 아름다운 봉분들이 즐비하다. 암치에서 등산을 시작해 구황산을 왕복하고 마패봉, 추산봉을 거쳐 고창남중학교로 내려서는데, 약 8.5㎞의 거리에 3시간 30분에서 4시간 정도가 걸린다. 조금 긴 산행과 산 하나를 더 타기 위해서는 암치에서 고산을 왕복 후 구황산을 올라도 된다. 고산 왕복 시 1시간 정도가 더 소요된다. 구황산은 아직 무명의 산이다. 선운산 자락의 구황봉과 헷갈릴 수 있다. 온 산에 진한 수풀 냄새가 진동해 산행 내내 심신이 쾌적하고 상쾌해진다. 먼 곳까지 가서 구황산 하나만 등산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은사리 단풍나무숲’을 더한다. 지난해 KBS TV ‘1박2일’이란 프로그램에서 이승기가 다녀온 단풍나무 숲으로 차량으로 20분 이내의 거리다. 백제 의자왕 4년(644년)에 지은 문수사의 사찰림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풍나무 숲으로 늦가을까지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대구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해, 구황산과 문수사 단풍나무숲을 즐기고 오후 9시 이전에 돌아올 수 있다.